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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메리(Bloody Mary)는 실존 인물이었을까요?

동히지지 2024. 12. 1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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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튜더(Mary Tudor)는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Henry VIII)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이자 스페인 출신 공주인 캐서린 오브 아라곤(Catherine of Aragon)의 딸입니다.

메리의 초기 생애는 그녀의 부친이 잦은 재혼을 통해 남자 후계자를 얻으려는 과정에서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이러한 혼란은 메리의 왕위 계승권뿐만 아니라 그녀의 생존 자체에도 위협이 되었습니다.

헨리 8세는 남자 후계자를 얻기 위해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를 설립했으며, 이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와 신교 간의 갈등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갈등은 메리가 1553년에 여왕으로 즉위하며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녀는 잉글랜드를 로마 가톨릭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 과정에서 잔혹한 수단을 사용하여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녀 들이 화형당하는 모습, 컬러 그림, 16세기.

메리 여왕 치하에서 수백 명의 신교도들이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당했으며, 젊은 토머스 와이어트(Sir Thomas Wyatt the Younger)가 이끄는 신교도 반란 실패 이후 수백 명이 추가로 처형되었습니다.

메리는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다가 1558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녀의 통치는 단 5년에 불과했습니다.

메리의 역사에 남긴 가장 지속적인 공헌은 그녀의 불행하지만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는 별명일 것입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숙취 해소제로 자주 거론되는 보드카와 토마토 주스 혼합 음료가 그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토마스 와이엇 경, 알려지지 않은 작가가 그린 패널 그림.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소장.

더욱 기원이 불분명한 것은, "블러디 메리"라는 말을 거울을 보며 반복하면 끔찍한 유령이 나타난다는 어린 시절의 괴담입니다. 그러나 메리 튜더의 행적이나 불운이 이러한 괴담을 만들어내어 밤샘 놀이 참가자들에게 영원히 원한을 품게 했다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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