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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엘비스는 "로큰롤의 왕"이라 불리나요?

동히지지 2024. 12. 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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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 캣(Hillbilly Cat)", "엘비스 더 펠비스(Elvis the Pelvis)", "멤피스 플래시(The Memphis Flash)" 등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는 수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가장 상징적이고 기억에 남는 별명은 바로 “로큰롤의 왕(King of Rock ’n’ Roll)” 또는 간단히 “왕(The King)”입니다.

별명의 기원

이 별명이 정확히 언제 처음 사용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956년 4월 19일, 웨이코 뉴스-트리뷴(Waco News-Tribune)의 기자 비아 라미레즈(Bea Ramirez)가 엘비스를 “21세의 로큰롤 세대의 왕”이라고 표현하면서 기록에 등장한 것이 초창기 사례 중 하나입니다.

한 달 뒤, 멤피스 프레스-시미터(Memphis Press-Scimitar)에서는 그를 “로큰롤의 신진 왕”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엘비스는 이 별명을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1969년 라스베이거스 공연 이후 기자회견에서 누군가 그를 “왕”이라고 부르자, 엘비스는 방 뒤편에 있던 팻츠 도미노(Fats Domino)를 가리키며 “진정한 로큰롤의 왕은 저분입니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습니다.

엘비스의 영향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비스는 “왕”이라는 별명을 유지하며 20세기의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의 음악은 전례 없는 인기를 끌었고,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총 149곡이 올랐으며, 그중 18곡은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의 TV 출연은 당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그의 콘서트는 북미 전역에서 관객 수 기록을 갱신했습니다.

엘비스는 북미를 넘어 영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어 1950년대 후반에만 영국 싱글 차트에서 18곡이 상위 10위에 올랐고, 33편의 영화는 그의 국제적 명성을 높였습니다.

음악적 혁신과 공헌

엘비스의 인기는 그의 혁신적인 음악 스타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컨트리와 블루스를 포함한 다양한 장르를 결합하여 로큰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형성했습니다.

엘비스가 이 장르를 발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인종적으로 분리된 음악계에서 백인 아티스트였던 엘비스가 프로듀서들에 의해 주목을 받으면서 로큰롤의 중심적인 촉진자로 부상했습니다.

대중적인 매력

엘비스의 성공에는 그의 대중적인 이미지도 한몫했습니다. 화려한 성격, 뛰어난 외모, 그리고 풍부한 카리스마는 팬들을 사로잡았으며, 그의 무대에서의 존재감은 정교한 의상과 논란의 여지가 있던 춤 동작으로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전 세계 팬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영향력

밥 딜런, 1965년.

엘비스의 커리어는 그의 생애를 넘어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최초의 “록스타”로서 이후 세대들이 따라야 할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으며, 그의 음악은 수천 명의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밥 딜런(Bob Dylan)과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을 포함한 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은 엘비스의 음악이 자신의 작업에 미친 영향을 인정했습니다. 비틀즈의 존 레논(John Lennon)은 “엘비스가 없었다면 비틀즈도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로큰롤의 왕"으로서 그의 자리는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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